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하라 유대인 (문단 편집) == 역사 == ## 유대인 전승에 입각한 서술은 불확실한 과장된 내용이 많으므로 서술 시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부하라 외에도 [[타슈켄트]], [[사마르칸드]], [[페르가나]]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었으며,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쉼켄트]]에도 많은 수가 거주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튀르크메니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호라산]]의 [[메르브]][* 서기 4세기 무렵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를 거점 삼아서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한 것이 이들의 기원이다. 이미 고대 말부터 [[사마르칸드]]와 [[타슈켄트]], [[발흐]] 내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었다. 서기 4세기 무렵 유대인들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유리 제조 기술을 중앙아시아로 가지고 들어와 유리 제조업을 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가 되면 사마르칸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서기 12세기 무렵 크게 부흥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일파는 송나라 시절 중국 카이펑로 이주하여 [[카이펑의 유대교도]]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중세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대인이 제일 많았던 도시는 [[사마르칸트]]였지만, [[칭기즈 칸]]의 군대가 사마르칸트를 파괴하는 와중에 전멸한 후 맥이 끊겼던 듯 하다. 원래 이 중앙아시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계 유대인]]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으나, 16세기 이후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영내의 이란인들을 쉬아파로 개종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순니파 튀르크인들과 대판 싸우면서 양자 간의 왕래가 힘들어지는 바람에 분화되었다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사파비 왕조는 이들의 라이벌이었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을 우대해주었고,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유대인의 생계 수단이 상당 부분 잠식당하면서 16~18세기 동안 [[페르시아계 유대인]] 인구 1/3 가량이 부하라 등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이주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사파비 제국에서 서쪽 오스만 제국과의 교역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반면(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종주국, 오스만 제국은 순니파 종주국으로 양측의 무슬림들이 서로 교역하기는 어려웠다) 사파비 제국 동쪽에서도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이 주로 동쪽 순니파 칸국들과 교역하였다. 본래 [[부하라 칸국]]은 [[시나고그]]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마스지드 건설 기금을 후원하면서 그 부속시설로 시나고그를 함께 짓게 하는 방식으로 예배 공간을 확보했다. 부하라 칸국의 통치자들은 개인 성향에 따라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고 관용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하라 유대인들은 종교 행사를 대개 집에서 몰래 하곤 했다. 유대인들이 이주해올 당시 부하라는 [[무굴 제국]]으로 군마로 쓸 말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차를 다른 지역으로 중계 무역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무굴 제국과 부하라와의 무역이 붕괴되고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무슬림 상인들이 경쟁자였던 부하라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 제국의 정복된 이래 이들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연달아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이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아닌 외국인으로 간주하였고, 러시아 제국 법을 적용받지 않았으며, 병역 부담을 지지 않는 대신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자기 명의로 사업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2차 대전 동안 많은 부하라 유대인들이 징집되었는데, 이 가운데 1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한다.[* 다만 통계상 3만여 명의 부하라 유대인 중 1만여 명이 전쟁 중 전사했다는 내용은 신빙성이 의심된다.] [[소련]]에서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 이후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건너갔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단체의 후원금으로 미국으로 이민갔다. 소련이 붕괴하기 얼마 전 시점인 1987년 기준 소련 통계와 이스라엘의 부하라 유대인 커뮤니티의 통계를 합산한 바에 따르면 부하라 유대인의 수는 총 8만 5천여 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4만 5천여 명은 구 소련 영내에, 3만 2천여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 등지에 3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다. 1989년부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대인 이민 제한을 철폐하자마자 우즈베키스탄 내 유대인 인구 대부분은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해외 이주를 택하였다. 이스라엘에는 부하라 유대인 후손이 10~12만명 정도 있으며, 미국에는 뉴욕 [[퀸즈]]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거주한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전체를 통틀어 1500명 정도 되는 부하라 유대인이 남아 있으며 우즈벡이 이슬람권에 해당되는 국가인 사정상 이들은 러시아인 이름을 쓰고 러시아인인 척 하면서 조용히 지낸다고 한다.[* 사실 우즈베크인들은 유대인들이랑 크게 관계가 나쁘진 않고, 그냥 보통이다.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은 이스라엘과 외교를 맺고있기도 하다. 다만 국민들 중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부하라에는 150명 정도만 남아있다. 유대인 묘지나 [[시나고그]]가 구시가지에 남아 있다. 러시아 제국 시대나 소련 시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이민 정착이 이루어지고,[* 대표적인 사례로 [[이리나 비녜르]]의 가족 사례를 들 수 있다.] 소련 시대 국가 무신론 정책으로 종교/종파가 다른 집단 사이에 통혼이 늘어난 이유로, 아슈케나짐 혹은 러시아인이나 우즈베크인 등등과 통혼하는 사례도 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